에스더님, 보내주신 사연 잘 확인했습니다. 몸살 핑계 데이트 취소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될 줄은 저도 몰랐는데, 사연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죽까지 배달시켜준 마음이 브런치 사진 한 장에 무너지는 그 기분, 짧게 넘길 얘기는 아니라 오늘은 이 얘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랜선 북클럽에서 만난 F양(29, 디자이너)과 두 달째 연락을 이어가던 31살 회계사 E군은, 지난 주말 F양이 “몸살 기운이 있어서 못 나가겠다”고 해서 약속을 미루고 대신 죽을 배달시켜줬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F양의 SNS에 다른 남자와 브런치를 먹는 사진이 올라왔고, 하필 그 남자 계정이 F양을 태그하면서 사진이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E군이 서운함을 표하자 F양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선을 그었다고 합니다.
북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유독 취향이 잘 맞았다고 합니다. 매주 같은 책을 읽고 랜선으로 만나 감상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책 얘기보다 서로의 하루 얘기가 더 길어지는 사이가 됐습니다. E군은 F양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줄 정도로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정작 만나서 밥 한 끼 먹자는 약속만 잡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는 일이 반복됐다고 합니다.
몸살 핑계 데이트 취소, 죽 배달까지 받고도 브런치를 갔다면
이 부분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몸살이 진짜였다면 죽을 받고 쉬었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다른 남자와 마주 앉아 브런치를 먹었다는 건, 최소한 그 시점엔 몸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픈 척으로 한 사람의 호의를 받아내고, 그 시간에 다른 약속을 지킨 셈이 됩니다.
이 상황을 다른 자리에 옮겨서 보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어떤 손님이 매장에 “몸살이라 오늘 못 가니 환불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시각 다른 매장에서 결제한 영수증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환불 담당자 입장에서는 “몸이 안 좋았다는 게 맞나”보다 “이 사람 말을 앞으로 얼마나 믿을 수 있나”가 더 큰 문제로 남습니다. 사실 확인이 아니라 신뢰 자체가 무너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라는 방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에스더님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제가 뭘 잘못 판단한 걸까요”—에 대한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F양의 말대로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닌 건 사실입니다. 그 점에서는 F양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와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F양이 브런치 약속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E군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굳이 몸살이라는 거짓 이유를 대고, 거기다 죽까지 받아 챙긴 뒤 다른 약속을 지킨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관계의 정의와 별개로,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여기서 유리한 편집도 하나 짚어보겠습니다. F양은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했지만, 정작 몸살이라는 핑계를 댄 것부터가 이미 “상관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사이였다면 애초에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F양도 이 관계가 완전히 자유로운 사이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따져보면, F양의 방어 논리에는 시점의 오류도 있습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 상관없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애초에 몸살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상관없는 사이라면 “선약이 있어서 못 만난다”고 정직하게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거짓말은 하고, 걸린 다음에야 “상관없는 사이”를 방패로 꺼내는 건 순서가 뒤바뀐 논리입니다. 상관없는 사이라는 자격은 처음부터 정직했을 때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몸살 핑계, 역지사지로 한번 뒤집어보겠습니다
만약 E군이 반대로 “몸이 안 좋아서 오늘 약속 어려울 것 같다”고 하고, F양이 걱정돼서 뭔가를 챙겨줬는데 알고 보니 E군이 다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F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아마 지금 E군과 똑같은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라는 방어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걸, F양은 아마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이쯤에서 F양이 할 법한 다음 변명도 미리 짚어두겠습니다. “그 브런치는 원래 잡혀있던 약속이었고, 몸살은 그날 갑자기 심해진 거라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어야 맞습니다. “선약이 있는데 몸이 안 좋아서 고민되지만 가보려고 한다”고 했다면 최소한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남았을 겁니다. 숨기고 걸린 다음에야 나오는 설명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변명의 신뢰도를 회복시켜주지 못합니다.
제 지인 중에 정중한 박사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얘기를 듣더니 곧바로 진지한 얼굴로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국제 알리바이 신뢰도 평가 기준으로 보면 하위 3%에 해당하는 사례다. 핑계의 종류(질병)와 증거(SNS 태그)가 완전히 상충하는데, 이런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며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설명했는데, 정작 본인도 지난달에 “야근”이라 해놓고 동창회 사진에 태그돼서 여자친구한테 잔소리를 들은 전적이 있다는 걸 뒤늦게 실토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런 사례가 국제 기준까지 세울 만큼 흔한 유형이었던 셈입니다.
정중한 박사는 한술 더 떠서 “이런 사례는 보통 세 단계로 진화한다”는 나름의 이론까지 펼쳤습니다. 1단계는 “핑계만 대고 아무 흔적도 안 남기는 완전범죄형”, 2단계는 “핑계는 댔지만 흔적 관리에 실패해 걸리는 태그형”, 3단계는 “걸리고도 끝까지 발뺌하다 오히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모는 역공형”이라는데, 이번 사연은 2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게 정중한 박사의 결론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학설은 세상 어디에도 정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듣고 나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에스더님께 필요한 건 사과 요구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거짓말을 들켰다”가 문제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들켰을 때 사과 대신 “상관없지 않냐”는 선 긋기가 먼저 나왔다는 태도입니다. 아팠던 게 사실이 아니었던 것 자체보다,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미안함이 아니라 방어부터 나왔다는 게 더 무겁게 봐야 할 지점입니다.
지금 에스더님께 필요한 건 F양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이 관계에 시간을 계속 쓸지 말지를 스스로 정하는 일입니다. 사과를 받아낸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신뢰의 균열이 원상복구되는 것도 아니고, 사과 여부에 매달리는 순간 다시 F양의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뭔지 정하고 얘기하자”고 한 번 더 물어보시고, 거기서 F양이 여전히 발뺌한다면 답은 이미 나온 셈입니다. 반성하는 사람은 방어 대신 인정을 먼저 합니다. 방어가 먼저 나오는 사람과는, 아무리 취향이 잘 맞고 대화가 즐거워도 관계의 결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몸살 핑계 데이트 취소를 겪어보신 분이라면, 상대의 거짓말 자체보다 그 거짓말이 들켰을 때 나온 반응을 더 유심히 보시길 바랍니다. 아픈 건 누구나 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걸렸을 때 미안함 대신 선 긋기가 먼저 나온다면 그건 이번 한 번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반복될 패턴일 가능성이 큽니다.
죽 배달까지 시켜준 그 마음은 절대 헛되거나 어리석은 게 아니었습니다.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은 원래 그렇게 즉각적이고 계산 없이 나오는 게 정상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을 받은 쪽이 그에 걸맞은 정직함으로 답하지 않았다는 데 있을 뿐, 에스더님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에스더님의 시간과 마음이 다음엔 좀 더 정직한 사람에게 쓰이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